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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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0 수요저녁예배 설교 (벧전 2:19-25 / 주님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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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3-20 21:29 조회103회 댓글0건

본문

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yTcnOd4GXgM?si=5OW_sDMbAbZaJ_dx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있다. 그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면 큰 유익이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들 보기에도 참 아름답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견디지 못하고 원망불평으로 죄를 지으면 큰 손해를 보고 결국 불행해진다.

본문에는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종류 세가지와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 그 본을 말씀하시고 따라가도록 교훈하고 있다. 


19절

첫째,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다. 내가 아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당하는 고난이다.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난을 당하는데, 그 중에 가장 속상한 것이 부당한 고난이다. 자기가 잘못해서 매를 맞고 욕을 먹으면 내가 잘못했으니 벌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혀 잘못한 것이 없고, 실수한 것도 없는데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견디기 참 어려울 것이다.

요셉이 그런 고난을 당했다. 요셉의 이복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다가 죽이려고까지 했다. 구덩이에 빠뜨렸는데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죽이지는 않고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린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젊은 날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부당한 고난을 당해서 참 속이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잘 인내했다.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서 주인의 집의 총무로 임명을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 동시에 요셉도 최선을 다해 충성한 것이다.

주인이 아내가 음욕을 품고 요셉을 유혹하는 것을 뿌리치고 도망을 쳤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또 참은 것 같다. 옥살이 하면서도 참고 또 참으면서 성실하게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 하나님도 요셉을 인정하셔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고 지극히 큰 은혜와 복을 받도록 인도해주셨다.

다윗도 참 많은 고난을 당했다.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 다니고 숨어 다니고 외국에 망명까지 했다. 얼마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겠는가?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부당한 고난을 당했다. 다윗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을 잘 참았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시고 왕으로 세워주셨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모든 인생을 지켜 보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억울하고 속상한 것을 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아름답게 여겨주신다. 얼마나 은혜를 베풀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안쓰럽고 붙들어주고 싶겠나?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로 갚아주신다.

그런데 사람들이 억울한 것을 참기가 참 어렵다.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누가 말하면 얼마나 억울한가? 얼마나 속상한가? 그것을 참지 못해서 실수하고 더 큰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참으면"이라는 말씀이다. 참는 것이 아름답다. 사람들은 참는 것을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무시당한다고 생각한다. 뭐가 아쉬워서 참느냐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참지 않으려고 이상한 논리를 갖다 붙이고 안 참는 것이 잘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19, 20절에 "참으면"이 세번 반복되고 있다. 참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어서 결국 복을 받게 만든다. 잘 참는 것이 위대한 사람이고, 복받을 일이다. 


20절

둘째, 자신이 잘못해서, 실수해서, 큰 죄를 지어서 매를 맞는 고난이 있다. 그것을 당연히 받아야 될 고난이다. 억울한 것이 아니다. 아프고 속상해도 참아야 한다. 억울하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런데 이런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 창세기에 보면 하갈이 그런 일을 겪었다. 사라의 몸종이었는데, 사라가 임신이 되지 않자 자기 몸종을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해서 아이를 낳으면 자기 아이로 삼으려고 했는데, 하갈이 잉태되어 아들을 낳자 자기 주인을 멸시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러다가 하갈이 쫓겨나서 광야 길에서 방황하고 많은 고난을 당한다. 만약에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칭찬받고 대접받고 귀하게 여김을 받았을 것이다. 공주 대접 받으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을 멸시하다가 학대 당하고 집에서 쫓겨났다. 자기 잘못으로 쫓겨 났으니 하소연 할 수도 없다.

요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으면 풍랑을 만나지 않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았을텐데 불순종하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고난을 당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벧전 4:15)

쓸데 없는 일 하다가 고난 당하는 자들이 많다. 그런 고난은 유익이 없다. 고난일 뿐이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바로 서면 나아질 수 있겠지만 고난 자체에 유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잠 26:17)

개의 귀를 잡으면 어떻게 되겠나? 개에게 물리게 된다. 길을 가다가 괜히 남의 집 개의 귀를 왜 잡는가? 한심한 일이다.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개의 귀를 잡는 것과 똑같다. 욕먹고 싸우고 손해보게 된다. 고난이 따라오게 된다. 그런 고난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면 칭찬이 없다. 마땅히 잘못해서 받을 벌을 받는 것이다.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뉴욕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새떼에 의해서 양쪽 엔진에 불이 붙어서 추락할 위기에 놓였다. 조종사가 기지를 발휘해서 허드슨 강에 랜딩을 해서 150여명이 살게되었다. 어떤 사람이 일평생 모은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회개했다고 한다. 친구 일에 간섭하고 비난을 많이 했는데 후회를 많이 했다고 한다. 죽는 순간에 놓이니 자기 잘못한 것들이 생각이 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살아야 한다. 한번 밖에 살 수 없다. 지나버리면 아무리 후회하고 가슴을 쳐도 바꿀 수 없다. 죄를 짓고 매를 맞는 것은 참아도 칭찬이 없다. 


셋째,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있다. "선"은 말씀을 순종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것, 남을 도와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선을 행할 때 고난이 많이 따라온다. 그때 참으면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시고 많은 상을 주신다. 이런 고난을 많이 당한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이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바울이 죄를 짓고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다. 선을 행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 고난을 당했다.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 잘 참았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고, 고난 중에 기도하고, 더 열심히 복음을 증거했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선을 행하면 고난이 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선을 행하시다가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럴 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참아야 한다.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세가지 고난 가운데 세번째 고난이 가장 복된 고난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고난을 많이 당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선을 행하는 것을 그만 두려고 한다. 희생하며 수고하며 헌신하며 착한 일하며 남 도와주면서 왜 내가 욕먹고 손해보고 고난을 당해야 하냐고 하면서 안하려고 한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1절

"이를 위하여" 고난을 위하여 라는 의미이다. 고난 안당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고난 당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면서 고난 당할 때 이렇게 하라고 본을 보이셨다.

성도가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는데, 믿음 지키며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면서 어떻게 하셨는지 보면서 그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주님께서 고난 당하시면서 우리에게 본을 끼치셨다. 


22절

주님은 고난 받으실 때 죄를 짓지 않으셨다. 고난 받을 때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짓는다. 가장 먼저 입으로 죄를 짓는다. 원망, 불평, 탄식, 욕, 짜증이 나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입에 거짓도 없으셨다. 이것이 가장 어렵다. 우리가 가장 못하는 것이 이것이다. 잘 참고 견디고 믿음 생활 하는 중에 고난이 오면 입에서 원망과 불평이 쏟아진다. 주님은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고난이 올 때 거짓을 말하지 않으셨다. 


23절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다. 많은 욕을 받으셨다. 바알세불의 왕이라고 하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따지고 맞서서 욕하려고 하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힘이 없어서 이렇게 하셨을까? 능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하셨을까? 얼마든지 물리치고 이기실 수 있지만 참고 견디시므로 승리하셨다.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 위협하지 않으셨다. 심판하실 하나님께 다 맡기셨다. 


24절

주님은 자신이 할 일만 묵묵히 하셨다. 십자가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다. 주님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데에만 집중하셨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이 할 일만 하셨다.

만약 반대로 생각해보면, 주님이 욕을 먹고 곤욕을 당하실 때 그것에 대항하느라 구속사역을 완수하지 않으셨다면 실패자가 되셨을 것이다.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된다. 

많은 사람들은 엉뚱한 일에 참견하고 신경쓰고 대항하고 욕하고 싸우느라 우리 사명을 망각한다. 무엇을 해야 하고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잊어버리고 그것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사명을 감당하셨다. 묵묵히 자기 갈 길을 가시고 승리하셨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다. 고난당할 때 본을 보이시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보이셨다.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야 하겠다. 


25절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었다. 양들은 목자가 없으면 제 마음대로, 제 갈길을 간다. 세상 원리대로, 다른 사람이 가는대로 따라갔었다. 그러다가 길을 잃고 사명을 잊어버렸다. 이제는 주님의 본을 본받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겠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주님이 고난 받으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 살피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감으로 주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승리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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