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목사님설교

20240228 수요저녁예배 설교 (롬 5:1-11 / 칭의의 결과)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2-28 21:25 조회114회 댓글0건

본문

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2UBVdmDhOU4?si=uwPAjc0XNfP1T4f0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받을 복에 대해서 말씀한다. 물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과 복을 누리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받을 복이 있다. 


1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전에 죄인으로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원수 되게 만들고 심판의 자리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었다. 늘 불안해 떨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 속에서 살수 있게 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말씀이 중요하다(2,9,10,11절).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 우리 죄가 완전히 용서함을 받았다. 완전히 죄사함을 받았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다 인정해주시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화평을 누리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화평은 무엇을 가진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회복되어야 화평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 간에 다투면 화평이 깨지고 불안하고 평안하지가 않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되고 잠도 잘 오지 않는다. 늘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런데 화해하고 용서하고 화목한 관계가 이루어지면 평안이 찾아오고 화평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어서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다. 누구라도 죄를 지으면 관계가 깨지고 불안과 근심이 찾아온다. 이것이 첫번째 벌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첫번째 찾아오는 은혜가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죄사함 받고 평안을 누리며 은혜 가운데 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았다. 그러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이것은 믿는 자에게 당연히 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데도 화평하지 못하고 마음에 근심과 걱정과 불안이 가득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죄를 지었든지, 회개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분명하면 두려워할 필요 없다. 화평을 누리면서 살면 된다. 


2절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은혜 속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한번만 나가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아무 때든지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다. 세상 대통령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마음대로 나아가서 만나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루에 열번 가도 되고, 일년 내내 찾아가도 된다. 평생 날마다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구약시대에는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 안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피를 가지고 속죄제사를 드리면서 들어갔다. 하나님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아버지신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주님이 이땅에 내려오시고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해주셨다. 우리 죄를 완전히 사함 받게 하셨다. 예수님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었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 3:12)

예수님을 믿으면 담대함과 확신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은혜의 자리 앞에 언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인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신령한 복을 받는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면 주님이 그곳에 함께 계신다고 하셨다.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은혜의 장소로 나아가서 신령한 은혜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면 은혜의 세상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들어가지 않으면 은혜를 누릴 수 없다. 기도하지 않고 예배 드리지 않으면 자격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다를 것이 없다.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하나님이 언제든지 나와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했다. 은혜 가운데 계속 사는 것이다. 잠깐 누리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은혜를 계속 누리고 은혜 속에 계속 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는 특권, 흔들리지 않는 은혜를 주셨다. 들어가서 거기 서있으면 된다. 하나님과 늘 교제하면서 살면 된다. 이 놀라운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며 즐거워한다고 했다. 은혜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광에 참여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면 더 많이 그 영광을 사모하게 된다. 더 많이 그 영광을 누리고 싶어한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한번 만났다. 한번 만나고 이제 됐다고 하고 끝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닮아가고 참여하기를 원했다. 어떻게 해야 주님을 본받을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우리가 죄 아래 있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다(롬 3:23).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서 의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있고 영광을 바라보며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굉장한 특권인데 말씀으로만 들으니 실감이 안날 수 있는데 천국에 가보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감탄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일 3:2)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주님 재림하시면 우리가 주님을 직접 만나고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가 살게 되면 주님의 참 모습을 직접 보게 된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은혜를 누리도록 우리에게 자격을 주셨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성도의 즐거움이 이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고 환난이 면제되지 않는다. 믿는 자도 고난과 핍박을 받고 질병에 걸리고 가난해지기도 하고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런데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 왜 그런가?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고 했다. 환난을 당할 때 참고 견디면서 인내하게 된다. 환난이 없으면 인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내 없이는 환난을 이길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중간 과정은 전부 인내해야 한다. 환난 중에서 오래 참고 견디는 과정 속에서 인내가 이루어진다. 신앙생활에서 인내가 매우 중요하다. 인내로 구원을 이룬다고 했다. 말세에 믿음을 지키려면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 했다. 연단은 인격과 성품을 의미한다. 환난을 잘 견디면 인격이 성숙해지고 성품이 고상하게 변화된다. 큰 환난 속에서 참고 견디다보면 성숙해지고 온유해지고 겸손해진다. 그런데 요즘에는 환난 자체를 겪지 않으려고 한다. 힘든 것은 뭐든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쉽게만 살려고 하니 인내가 없어지고 연단이 없으니까 만들어지는 것이 없다. 인격이 고상해지고 거룩해지고 겸손해져야 되는데 그 기회 조차 생기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믿는 우리를 왜 세상에 두시고 환난을 당하게 하시는가? 인내를 이루고 연단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다.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다.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많이 받고 주님을 많이 닮고 영광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인내와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이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환난이 없으면 인내를 이룰 수 없고 인내가 없으면 연단을 이룰 수 없고 연단이 없으면 소망을 이룰 수 없다. 


5절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소망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끄럽게 된다. 그런데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놀라운 사랑을 주셨는지 깨닫게 하신다. 넘치게 풍성하게 부어주셨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믿음생활을 ㅎ게 하신다. 


6-8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었다. 우리는 연약해서 넘어졌다. 죄짓고 방황하고 주님을 멀리 떠났다. 그런데 주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어주셨다.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 방탕하고 악을 행하던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다. 경건한 자를 위해서 죽어주셨다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 죽어주셨다. 이해가 안되는 사랑이다. 그럴만한 귀한 모습이 전혀 없는데, 연약하고 가치 없는 자인데 우리를 살리려고 주님이 희생하셨다.

세상을 보면 남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가끔 있다. 그것도 선인을 위해서 죽어주는 것이다. 경건하지 않은 자, 죄인, 원수를 위해서는 죽는 자가 없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서 평생 죄짓고 살아간다. 항상 죄를 짓고 있다. 모든 생각과 하는 일이 다 악한 일이다. 심지어 기도하면서 죄를 짓는다. 설교말씀을 들으면서도 죄를 짓는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죄를 짓는다. 우리는 죄를 완전히 떠나서 살지 못한다. 항상 죄와 하나 되어서 더럽고 추하게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어주셨다.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시고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아는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것을 보면 안다. 이것이 증거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십자가를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면 알 방법이 없다. 이것이 가장 큰 증거인데 이것으로도 못깨달으면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는가?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9~10)

이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이땅에 보내주셨다. 


9-10절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다. 하나님과 원수지간으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어주셨다. 이 사랑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이해하고 깨닫게 해주셨다.

중요한 것은 피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피흘려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었다. 피로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한다. 피 중에서도 성자 예수님의 피로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구원은 피로 이루어진 구원이다. 주님이 생명을 바쳐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원수되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지게 했는데 죄를 사해주심으로 진노가 다 사라지게 하셨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절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죄사함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믿는 자 안에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죄사함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 속에서 살고 서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와 복을 주셨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세상 일이 잘되고 안되고가 상관이 없다. 젊고 늙은 것이 상관이 없다.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이다. 우리가 반드시 받은 것이고 받아야 하는 것이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날마다 이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야 하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